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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트의 거장 앤디워홀의 생애 – Colorful Life
가장 중요한 전시는 1964년 어퍼이스트사이드 갤러리에서 열린 [아메리칸 슈퍼마켓]입니다. 이 전시에서는 전형적인 미국의 작은 슈퍼마켓을 표현한 설치미술에서 통조림, 고기, 벽 포스터 등으로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워홀을 비롯하여 빌리애플, 메리이먼, 로버트 월츠 등 6명의 팝 아티스트가 참여하였습니다. 워홀의 캠벨깡통 스프그림은 1500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갔지만 사인이 담긴 캠벨 깡통은 6달러에 판매되었습니다. 이 전시는 앤디워홀이 얘기하고자 하는 팝아트와 예술이 무엇인지를 일반시민들에게 직접 들려주었던 첫번째 큰 행사였습니다.
앤디워홀은 1928년 8월 6일 필라델피아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앤드루 워홀라(Andle Worhola)로 아버지 온드라디 워홀(Ondrady Wowhol, 1889~1942)과 어머니 줄리아 워홀(Hall, 1892~1972)의 네번째 자녀로 태어납니다. 부부의 장남은 온드라디와 줄리아의 조국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났으며 미국에 오기전에 사망했습니다. 그 밖에 두 형제 폴 워홀(1922-2014)과 존 워홀(1925-2010)이 있습니다.
워홀은 1987년 2월 22일 오전 6시 32분 뉴욕의 맨해튼에서 사망합니다. 뉴스 기사에 따르면 워홀은 뉴욕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담낭 수술을 하며 좋은 경과를 보이고 있었으나 잠을 자던 중 갑작스러운 부정맥으로 인하여 사망했다고 합니다. 수술의 필요성이 진단되기 전부터 원래 워홀은 병원과 의사를 싫어했으며 정기적인 검진을 하지 않은 것 또한 사망의 원인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특히 68년 저격사건 이후 건강상태가 점차적으로 나빠졌습니다.
7 thg 12, 2021 — 앤디워홀 (1928년 8월 6일-1987년 2월22일)은 미국의 미술가로 팝아트 부흥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상업 일러스트레이터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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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트의 거장 앤디워홀의 생애
앤디워홀 (1928년 8월 6일-1987년 2월22일)은 미국의 미술가로 팝아트 부흥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상업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성공한 후 미국 현대미술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화제의 예술가였습니다.
앤디워홀의 예술세계는 회화에 국한되지 않고 드로잉, 페인팅, 실크스크린, 사진, 판화, 조각, 영상, 음악 등 매우 다양한 매체들이 예술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또한 1984년 발매된 컴퓨터를 이용한 컴퓨터 아트의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앤디워홀
저작활동 또한 활발했습니다. [인터뷰] 매거진 창간을 비롯하여 [앤디워홀의 철학]과 [팝-이즘] 등 방대한 양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특히 자신의 회고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 수많은 회고전, 자서전, 다큐멘터리 필름을 제작했습니다. “미래에는 누구나 15분 정도는 유명해질 수 있다”는 앤디워홀의 명언 중 하나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앤디워홀의 작품의 대부분은 미술시장에서 인기가 높아 고가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그의 창작활동은 음악계에서도 계속되어 락밴드인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프로듀싱하며 당시 펑크록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앤디워홀의 스튜디오이자 작업실인 [팩토리]에는 드래그 퀸, 보헤미안, 작가, 할리웃의 부유층 등 하이컬처에서 언더그라운드 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예술창작활동을 함께 하게됩니다.
앤디워홀의 고향인 펜실베니아 주 피츠버그에 있는 앤디워홀 박물관에서는 엄청난 수의 작품과 앤디워홀의 기록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개인 예술가 박물관으로써는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입니다.
미국 팝아트의 거장
그는 일생동안 회화, 조각 등의 미술, 영상, 음악 등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예술가적 기질로 하이컬처에서 언더그라운드까지 폭넓은 활동을 했습니다.
앤디워홀은 1928년 8월 6일 필라델피아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앤드루 워홀라(Andle Worhola)로 아버지 온드라디 워홀(Ondrady Wowhol, 1889~1942)과 어머니 줄리아 워홀(Hall, 1892~1972)의 네번째 자녀로 태어납니다. 부부의 장남은 온드라디와 줄리아의 조국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났으며 미국에 오기전에 사망했습니다. 그 밖에 두 형제 폴 워홀(1922-2014)과 존 워홀(1925-2010)이 있습니다.
앤디워홀의 부모는 우크라이나인으로 현재의 슬로바키아 북부에 위치한 미코바에서 온 이민자였습니다. 아버지는 1914년 미국으로 이민왔으며 어머니는 앤디워홀의 조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1921년 뒤늦게 미국으로 오게됩니다. 앤디워홀의 아버지는 미국에서는 탄광에서 일했고 워홀 일가는 피츠버그 옆 오클랜드에서 살았습니다. 독실한 가톨릭계 부모 밑에서 거의 매일같이 성 요한 비잔틴 성당에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때 워홀은 얼굴과 손발에 경련이 일어나는 신경계 질환인 시드넘 무도병에 걸리게 됩니다. 또한 몸에서 색소를 잃기도 했습니다. 이후 워홀은 종종 심기증에 걸려 병원과 의사를 극도로 두려워하고 학교에도 못 가게 됩니다. 이 무렵부터 모친의 곁에서 병석에 누워있는 상태로 은둔형 외툴이가 되어 모친에 의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침대에 틀어박혀 어머니 곁에 늘 붙어 있던 어린 시절에도 자신의 개성을 키웠습니다. 워홀은 라디오를 들으며 그림을 그리고 영화배우들의 사진을 수집하며 칩거생활을 즐겼습니다. 후에 워홀은 이 은둔형 외톨이 시절은 자신의 정체성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으며 훗날 예술적 재능의 뿌리가 되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워홀이 13세 때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45년 워홀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술교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피츠버그대에 입학하여 미술교육을 공부합니다. 그러나 도중에 교사가 되는 것을 그만두고 피츠버그 카네기공대에 입학했습니다. 이곳에서 워홀은 상업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대에 워홀은 모던 댄스클럽과 보자르 아트 소사이어티에 참여했으며 학생 미술지 Cano의 미술 디렉터를 맡아 1948년 표지 일러스트를 맡았고, 1949년에는 전 페이지의 일러스트를 담당했습니다.
워홀은 1949년 픽트리컬 디자인에서 미술학사 학위를 받은 뒤 뉴욕으로 이동하여 잡지 일러스트와 광고로 업무경력을 시작하게 됩니다.
상업 일러스트레이터의 시대
1950년대 워홀은 신발광고에서 개성적인 잉크드로잉을 그리며 지명도를 높여갔습니다. 이때의 작품에서는 특히 아이밀러사의 구두광고가 유명합니다. 1952년에는 아이밀러 구두점의 광고 디자인이 신문광고미술 부문에서 아트디렉터스 클럽상을 받았습니다. 또한 보그 등 패션지 광고와 윈도우 디스플레이 광고도 하게 됩니다.
1952년 첫 개인전 [트루먼 카포티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15개의 드로잉]을 개최하였으며 장소는 보도르 갤러리로 트루먼 카포티로부터 영감을 받은 작품들을 전시했습니다. 이때까지의 작품은 아직 팝아트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50년대에 개인전을 여러차례 더 열었지만 이 시절의 그림은 거의 팔리지 않았습니다.
이 무렵에 어머니와 함께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1952년 친구와 댄서들과 함께하는 공동생활에서 아파트 생활로 옮겨 어머니 줄리아를 뉴욕으로 불러 생활하게 됩니다. 줄리아는 원래 레터링에 능해 워홀의 일러스트에 글을 쓰는 어시스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또 코를 수술하고 가발을 착용하며 이름을 본명 앤드루 워홀러에서 앤디워홀로 바꿉니다.
이 lprp의 워홀기법은 블롯티드 라인 스타일이라고도 불리는데 카네기공대시절 개발한 것으로 비흡수성 종이 위에 그린 선화에 잉크칠을 한 뒤 종이를 입혀 전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기법으로 그려진 선들은 군데군데 번지거나 선이 사라지면서 앤디워홀 특유의 섬세한 선 표현을 만들어냈습니다.
또 1950년대에는 음반업계에서는 비닐음반 생산, 하이파이, 스테레오 녹음이 동시에 확대되어 가는 시기로 RCA음반에서 음반커버와 광고 디자인 업무를 워홀에 의뢰하게 됩니다. 워홀은 이즈음 그림 제작의 수단으로 실크스크린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로잉을 포함한 회화의 초기 실크스크린 작품은 그 후 곧바로 사진작품으로도 사용됩니다.
팝아트로 전향하기 이전 워홀의 상업예술시대의 실크스크린 기법은 팝아트계에서 특히 판화작품과 관련된 형태로 혁신적인 기술을 가져왔습니다. 블로티드 라인 스타일을 사용한 워홀의 50년대 작품에는 자동차, 신발, 초상화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1950년대 작품 앤디워홀
팝아트
1960년대에 워홀은 팝아트의 개인전도 시작합니다. 뉴욕의 휴고 갤러리와 보드리 갤러리에 전시를 열었고 캘리포니아의 경우 로스앤젤레스 펠러스 갤러리에서 1962년 7월 9일 첫 개인전을 개최합니다. 이때 32점짜리 캠벨 수프캔을 그린 캔버스를 진열했습니다. 이 전시회는 오늘날 애디워홀의 팝아티스트로서 데뷔한 전시회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캠벨스프 통조림 1962년 작
워홀의 뉴욕에서의 첫 팝 아티스트로서의 개인전은 1962년 11월 6일부터 24일까지 스테이블 갤러리에서 개최된 개인전이었습니다. <마릴린 2연화><100개의 수프캔><100개의 콜라병 ><100달러지폐>등의 작품을 전시하였으며 이 개인전에서 1963년 제작한 워홀의 영화 [슬립]에서 스타를 연기한 시인 존 코르노를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1960년대의 워홀은 달러, 버섯구름, 전기의자, 캠벨 수프캔, 코카콜라병 등 지극히 미국적인 오브제와 마릴린 먼로와 엘비스 프레슬리, 말론 브랜드, 무하마드 알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미국의 스타들을 모티브로 한 실크스크린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밖에 신문제목과 시민운동을 공격하는 경찰견 사진 등도 모티브로 한 작품이 제작되었습니다.
앤디워홀 코카콜라
이런 작품들 제작하고 있던 시기에 스튜디오이자 작업실인 팩토리를 창설하여 팩토리에는 아티스트는 물론 뮤지션, 작가, 언더그라운드 등 다양한 장르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워홀의 팝아트는 큰 인기를 끌었지만 또한 논쟁을 수반하였는데 워홀은 코카콜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나라의 멋진 점은 미국은 가장 부유한 소비자가 가장 가난한 사람과 같은 상품을 구매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TV를 보고 코카콜라를 마시고 대통령이 코카콜라를 마시고 리즈테일러가 코카콜라를 마시고 그리고 일반 대중또한 코카콜라를 마신다. 코카콜라는 코카콜라이며 구석에서 부랑자가 마시는 콜라보다 맛이 더 좋은 콜라는 없다. 모든 콜라의 맛은 같고 모든 콜라는 훌륭하다. 리즈 테일러도 대통려도 그리고 일반 대중들도 이해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전시는 1964년 어퍼이스트사이드 갤러리에서 열린 [아메리칸 슈퍼마켓]입니다. 이 전시에서는 전형적인 미국의 작은 슈퍼마켓을 표현한 설치미술에서 통조림, 고기, 벽 포스터 등으로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워홀을 비롯하여 빌리애플, 메리이먼, 로버트 월츠 등 6명의 팝 아티스트가 참여하였습니다. 워홀의 캠벨깡통 스프그림은 1500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갔지만 사인이 담긴 캠벨 깡통은 6달러에 판매되었습니다. 이 전시는 앤디워홀이 얘기하고자 하는 팝아트와 예술이 무엇인지를 일반시민들에게 직접 들려주었던 첫번째 큰 행사였습니다.
The American Supermarket 1964 (Paul Bianchini’s Upper East Side Gallery, NY)
콜라보레이션 활동은 앤디 워홀의 모든 작업에 걸쳐 빈번하게 사용된 방법 중 하나이며 특히 1960년대에 들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가장 중요한 콜라보레이션 작업 중의 하나는 시인이자 사진가, 영화감독이기도 한 제럴드 말랑가와의 작품이었습니다. 말랑가는 워홀과 실크스크린, 영화, 조각 그 외에도 다양한 작품에서 협업활동을 했습니다. 이 밖에도 온다인, 빌리 네임, 브리지 베를린 등이 팩토리를 다니며 앤디워홀을 어시스트했습니다.
워홀의 팩토리에서는 이들을 어시스턴트라고 불렀지만 상하관계는 없었습니다. 워홀은 어시스턴트로부터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얻어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어시스턴트이자 콜라보레이터로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 워홀은 니코, 이디 세지윅, 비바, 울트라 바이올렛, 재키 커티스, 캔디 달링 같은 보헤미안이나 카운터 컬쳐이 저명인사들을 다수 팩토리로 초대하여 그들을 슈퍼스타라고 불렀습니다. 슈퍼스타로 불린 사람들은 모두 팩토리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특히 뉴욕 언더그라운드 아트와 영화에서 중요한 인물인 작가 존 조르노와 영화감독 잭스 스미스 역시 1960년대 워홀의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워홀총격 사건
1968년 7월 3일 과격파 페미니스트인 밸러리 솔라나스가 팩토리에서 워홀과 미술비평가이자 큐레이터인 마리오 아마야에게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총격하기 이전 솔라나스는 팩토리의 단골이었지만 다른 아티스트들과의 교류는 적었으며 팩토리 내에서 소외된 상태에 있었다고 합니다.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성적학대를 받았던 솔라나스는 남성을 증오했고 본인이 레즈비언임을 자각하고 동료를 찾아 시골에서 뉴욕으로 상경했습니다. 그러나 뉴욕에서 노숙자가 되어 매춘을 하며 살게 되는데 남자를 싫어하면서도 남자에게 구걸하는 처지에 놓여 점점 남성혐오가 심해지게 됩니다. 1967년에는 SCUM(남성근절협회)를 출판하여 남성혐오에 대하여 소리높여 외치는 과격파 페미니스트로서의 활동을 시작합니다.
앤디워홀의 팩토리
이러한 그녀의 강렬한 캐릭터에 주목한 워홀은 1968년 제작한 영화 [어 맨]에 그녀를 출연시킵니다. 여기서 그녀와 워홀 사이가 엇갈리게 되는데 워홀은 솔라나스를 사이코의 구경거리 정도로 출연시킨 반면 솔라나스는 자신이 워홀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솔라나스의 워홀에 대한 배신감과 증오가 더해갑니다.
솔라나스는 습격 이튿날 체포되는데 그녀는 저격 이유에 대하여 워홀이 그녀의 인생을 너무 통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솔라나스는 결국 정신병원에 3년 동안 강제 입원하게 되었고 총격사건 이후 팩토리는 출입과 행동이 엄밀하게 제한받게 되어 자유로운 예술활동의 근거지였던 팩토리의 60년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비즈니스 아트와 파티
1960년대 워홀 작품의 성공과 화제성에 대비하여 후일에는 작품의 제작보다 사업에 치중하기 시작하여 1970년대는 비교적 조용한 10년이 됩니다.
밥 코라셀로에 따르면 워홀은 이 무렵 부유층 패트론의 주문초상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합니다. 워홀이 만든 초상화 작품으로 유명한 것은 이란국왕인 모하마드 레자 파프라비, 국왕의 아내 팔레비 여왕, 국왕의 딸 아슈라프 팔레비, 믹 재규어, 라이자 미네리, 존 래논, 다이아나 로즈, 브리짓 바르도 등이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워홀의 초상화 작품은 1973년 제작된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의 초상화 작품입니다.
Mao Tse-Tung 1973년 작
또한 제럴드 말랑가와 함께 1972년에 대중문화를 소재로 하는 잡지인 [인터뷰]를 창간하고 1975년에는 자서전 [앤디워홀의 철학]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에서 워홀은 돈벌이는 아트이고 노동은 아트이며 좋은 사업은 가장 좋은 아트라고 말했습니다. 앤디워홀TV 등 TV프로그램의 제작도 시작하게 됩니다.
워홀은 파티를 좋아해 맥스캔자스 시티를 중심으로 뉴욕의 여러 나이트클럽에서 연일 파티를 열었습니다. 단지 워홀 자신은 말이 없어 과묵한 편이었고 수줍음이 많았으므로 파티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 파티를 여는 주목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미술 비평가 로버트 휴스는 그런 워홀을 유니언 스퀘어의 하얀 두더지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앤디워홀이 창간한 매거진 [인터뷰]
앤디워홀의 사망
워홀은 1987년 2월 22일 오전 6시 32분 뉴욕의 맨해튼에서 사망합니다. 뉴스 기사에 따르면 워홀은 뉴욕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담낭 수술을 하며 좋은 경과를 보이고 있었으나 잠을 자던 중 갑작스러운 부정맥으로 인하여 사망했다고 합니다. 수술의 필요성이 진단되기 전부터 원래 워홀은 병원과 의사를 싫어했으며 정기적인 검진을 하지 않은 것 또한 사망의 원인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특히 68년 저격사건 이후 건강상태가 점차적으로 나빠졌습니다.
그러나 워홀의 가족은 병원의 관리가 부실했다며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병원 측의 부적절한 치료가 원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병원측은 의료 오진을 곧바로 인정하여 워홀의 가족은 병원 측에서 위자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피츠버그 세인트존 가톨릭 공동묘지의 부모 옆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사망후 4월 1일 뉴욕 세인트패트릭 대성당에서 추모미사가 열렸습니다.
앤디워홀의 유산은 약 6억 달러 규모로 알려져 있으며 워홀이 생전에 모은 미술품과 골동품, 가구 등은 경매에 부쳐져 약 2000만 달러의 매출을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1987년에는 앤디워홀 시각예술재단이 창설되면서 앤디워홀과 관련된 저작권 비즈니스 외에도 워홀의 유지에 따라 장래성 있는 작가를 지원하는 예술지원사업 등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앤디 워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65년(36세), 벨벳 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 이하 V.U.)의 데뷔 앨범을 프로듀싱 한다. 워홀은 V.U.의 연주를 듣고 공동 작업을 신청해, 배우 겸 모델인 니코를 데려와 합류시킨다. 1967년 3월 발매한 그들의 데뷔작 《The Velvet Underground & Nico》에서는 프로듀스와 자켓 디자인을 다루었다. 실크 스크린 프로세스에 의한 〈바나나〉를 그린 레코드 표지는 유명해 졌다. 전위적 음악이기 때문에 앨범은 별로 팔리지 않았지만, 이후 재평가되었다. 워홀은 V.U.의 악곡을 영화의 사운드 트랙에도 이용했다. 두 번째 앨범을 제작할 무렵에는 워홀과의 관계도 끝난다. 그들과의 관계는 영화 《루 리드: 로큰롤 하트》(Lou Reed: Rock and Roll Heart)에 그려져 있다. 또 워홀의 사후 멤버인 리드와 케일은 재결성해 《드렐라를 위한 노래》(Songs For Drella, 1990년)라는 추모곡을 만들었다. (Drella는 드라큘라와 신데렐라를 조합한 합성어이며, 워홀에 대한 그들의 인상을 나타냈다고 한다)
실크 스크린 프린트를 제작 한편 1963년부터 1968년에 걸쳐 60편 이상의 영화도 다루었다. 그러나 실험영화 같은 작품으로 일반에 알려진 것은 적다. 처음 공개된 작품은 1966년 《첼시 걸즈》이며, 가장 유명한 것은 잠자는 남자를 5시간 동안 계속 비춰주는 《잠》(Sleep)(1963년)이라는 작품이다. 그는 액션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고 (본질적으로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차이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영화가 “근본적으로 같을 뿐만 아니라, 세세한 부분까지 완전히 똑같은 것”을 원했다. 끝없이 변화가 없는 영상은 보편적인 것을 테마로 한 워홀의 관점에서 보면 이상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후에도 영화 제작을 하였고, 극 영화도 제작하였다. 뉴욕의 유명 호텔 “첼시”를 무대로, 각 객실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임의의 2방만 적절한 시간을 선택하여, 2개의 화면을 이용하여 무작위로 계속 비춰주는 (도중 한쪽 스크린은 니코의 모습이 임의로 삽입된다), 《첼시 걸즈》(1966년)는 미국에서 출판에서 대히트를 했다.
1928년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슬로바키아(당시는 체코) 이민 가정으로 위로 두 형이 있었고, 부모님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그 자신도 평생 교회를 다녔다. 본래 그의 집안 성씨는 바르홀라(Varchola)였으나, 영어식인 워홀로 바꾸었다. 육체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1942년 앤디가 14세 때 사망하였고, 그 후 어머니 줄리아가 혼자 아들들을 키운다. 앤디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역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카네기 공과 대학(현재 카네기멜론 대학교)에서 상업 예술을 전공한다. 1949년 졸업을 하면서 뉴욕 시로 이주하여 잡지 삽화와 광고 제작으로 명성을 쌓았다.
앤드루 워홀라 주니어(영어: Andrew Warhola Jr., 1928년 8월 6일 ~ 1987년 2월 22일)는 앤디 워홀(영어: Andy Warhol )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던 미국의 미술가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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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워홀라 주니어(영어: Andrew Warhola Jr., 1928년 8월 6일 ~ 1987년 2월 22일)는 앤디 워홀(영어: Andy Warhol )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던 미국의 미술가이자, 출력물 제작자, 그리고 영화 제작자다. 시각주의 예술 운동의 선구자로, 팝 아트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산업 일러스트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후에 화가, 아방가르드 영화, 레코드 프로듀서, 작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가장 높은 가격을 기록한 워홀의 그림은 1963년에 제작된 캔버스로 1억 달러에 거래된 《여덟 명의 엘비스》(Eight Elvises)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개인적으로 거래된 이 사실은 《이코노미스트》의 기사를 통해 알려졌다. 이코노미스트는 미술 시장의 주도자로서 워홀의 지위를 설명한 것이다.[1] 1억 달러라는 가격은 잭슨 폴록, 파블로 피카소, 구스타프 클림트와 윌렘 드 쿠닝만이 기록한 기준 가격이다.
생애 [ 편집 ]
1928년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슬로바키아(당시는 체코) 이민 가정으로 위로 두 형이 있었고, 부모님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그 자신도 평생 교회를 다녔다. 본래 그의 집안 성씨는 바르홀라(Varchola)였으나, 영어식인 워홀로 바꾸었다. 육체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1942년 앤디가 14세 때 사망하였고, 그 후 어머니 줄리아가 혼자 아들들을 키운다. 앤디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역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카네기 공과 대학(현재 카네기멜론 대학교)에서 상업 예술을 전공한다. 1949년 졸업을 하면서 뉴욕 시로 이주하여 잡지 삽화와 광고 제작으로 명성을 쌓았다.
캠벨 수프 캔
1950년 (22세) 대학 졸업 후 뉴욕으로 옮겨 ‘보그'(VOGUE)나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 등의 잡지 광고와 일러스트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2년에는 신문광고 미술 부문에서 “아트 디렉터스 클럽 어워드”(Art Director’s Club Award)를 수상하고, 상업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로 성공했지만 동시에 주문주의 요구에 부응하여 그림을 수정 하느라, 사생활에서는 대인 관계에서 타격을 받은 고난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단지 정확하게 비추는 TV 영상처럼 내면을 버리고 표층을 철저히 충실하게 추구하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앤디 워홀은 실크 스크린(silk screen)을 작업에 사용했다. 워홀이 신발 산업에서 일할 때 잉크를 종이에 묻혀서 인쇄하는 블라티드 라인(blotted line)이라는 초보적인 수준의 인쇄 기술을 개발했다.
1960년 (32세), 그는 일러스트레이션의 세계를 버리고 미술의 세계로 옮겨간다. ‘배트맨’, ‘딕 트래이시’, ‘슈퍼맨’ 등 만화를 모티브로 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지만, 계약했던 〈레오 캐스테리 갤러리〉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 만화를 모티브로 한 시대를 풍미한 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팝 일러스트레이션 작품을 접한 이후 이 주제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당시 미국은 눈부신 경제 발전을 추구하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그는 〈캠벨 수프 캔〉이나 〈코카콜라 병〉 등 유명한 상품들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후에 그는 실크스크린으로 바꾸어, 대량생산된 상품의 그림을 그리는 것만 아니라 작품 자체를 대량생산하였다. 그는 “예술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뉴욕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인 《팩토리》(The Factory)에서 판화, 신발, 영화, 책 등을 만들어내었다. 워홀의 작품에는 의뢰를 받아 제작한 초상화나 광고도 포함되어 있다.
1961년 (33세),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캠벨 수프 캔〉이나 지폐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그린다. 1962년에는 실크 스크린 프린트를 이용하여 작품을 양산하게 된다. 주제에도 대중적으로 화제가 풍부한 것을 선택했다. 메릴린 먼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는 곧바로 영화 《나이아가라》의 먼로의 최고의 스틸 사진 초상화를 잘라서 다른 색깔을 입혀서 대량 생산을 계속했다. 제트기 사고, 자동차 사고, 재해 등의 화재의 신문 보도 사진을 사용했다.
팩토리에서 제작 활동:30대후반~40대 [ 편집 ]
1964년(35세)부터는 뉴욕에 《팩토리》(The Factory)라고 하는 스튜디오를 짓는다. 팩토리는 알루미늄 포일과 은빛의 그림물감으로 덮인 공간이며, 마치 공장에서 대량생산 하는 것 같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을 이미징하여 만들어졌다. 그는 여기서 예술 노동자(art worker; 아트 워커)를 고용해, 실크 스크린 프로세스 프린트, 구두, 영화 등의 작품을 제작 한다. 팩토리는 믹 재거(롤링 스톤스), 루 리드(벨벳 언더그라운드), 트루먼 커포티(작가), 에디 세즈윅(모델) 등 아티스트가 모이는 장소가 된다.
1965년(36세), 벨벳 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 이하 V.U.)의 데뷔 앨범을 프로듀싱 한다. 워홀은 V.U.의 연주를 듣고 공동 작업을 신청해, 배우 겸 모델인 니코를 데려와 합류시킨다. 1967년 3월 발매한 그들의 데뷔작 《The Velvet Underground & Nico》에서는 프로듀스와 자켓 디자인을 다루었다. 실크 스크린 프로세스에 의한 〈바나나〉를 그린 레코드 표지는 유명해 졌다. 전위적 음악이기 때문에 앨범은 별로 팔리지 않았지만, 이후 재평가되었다. 워홀은 V.U.의 악곡을 영화의 사운드 트랙에도 이용했다. 두 번째 앨범을 제작할 무렵에는 워홀과의 관계도 끝난다. 그들과의 관계는 영화 《루 리드: 로큰롤 하트》(Lou Reed: Rock and Roll Heart)에 그려져 있다. 또 워홀의 사후 멤버인 리드와 케일은 재결성해 《드렐라를 위한 노래》(Songs For Drella, 1990년)라는 추모곡을 만들었다. (Drella는 드라큘라와 신데렐라를 조합한 합성어이며, 워홀에 대한 그들의 인상을 나타냈다고 한다)
40대와 저격 사건 [ 편집 ]
1968년 6월 3일 팩토리 스튜디오의 직원 밸러리 솔라나스가 스튜디오에 들어와 워홀을 총으로 세 발 쏘았다. 두 발은 빗나갔지만 세 번째 총알이 그의 양쪽 폐, 지라, 위, 식도를 관통했다. 병원에서 의사들은 그가 죽었다고 선언했으나 그는 그 총격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했다. 솔라나스는 후에 정신감정을 통해 편집조현병 진단을 받았으며, “그는 내 삶의 너무 많은 부분을 통제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1995년에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는 사교계로부터 의뢰를 받아 초상화 실크 스크린 제작 프린트를 다수 제작한다. 1970년 〈라이프 지〉에 의해서 비틀즈와 함께 ‘1960년대에 가장 영향력이 있던 인물’로 선정된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방중에 맞추어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같은 해 그의 어머니가 피츠버그에서 사망하면서, 전 세계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게 된다.
50대와 말년 [ 편집 ]
1982년부터 1986년 사이에는 재해와 신화를 모티브로 한 일련의 작품을 창조한다. 마지막 작품은 1986년 〈레닌의 초상화〉 등이다.
1987년 2월 21일 뉴욕 코넬 의료 센터에 담낭 수술을 받은 다음 날인 22일, 페니실린 알레르기 반응으로 상태가 악화되어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58세였으며, 평생 독신이었다. 피츠버그 성 세례 요한 가톨릭 공동 묘지에 묻혔다. 피츠버그 시내에서 아르게이니 강건너 맞은 편 언덕의 노스 쇼어 지역에 앤디 워홀 미술관이 있다. 개인 예술가 전문 미술관으로서 미국 최대이다.
작품 세계 [ 편집 ]
워홀의 작품 세계는 대부분 ‘미국의 물질문화’와 연관되어 있다. 그는 돈, 달러 기호, 식품, 잡화, 구두, 유명인, 신문 스크랩 등을 그렸다. 그에게 이런 주제들은 미국 문화의 가치를 의미했다. 예를 들어, “코카콜라는 언제나 코카콜라다. 대통령이 마시는 코카콜라는 내가 마시는 코카 콜라와 같은 그 콜라다”. 그는 대중에게 익숙하고 유명한 이미지를 이용해 20세기 미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표현했다.
화려한 색채 같은 도판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실크 스크린 기법을 이용하여, 마릴린 먼로나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스타의 이미지와 상품, 달러 기호 등 미국 사회에 유포하는 경박한 기호를 작품화했다. 고전 예술과 모더니즘 등과는 달리 그 도안은 풍부한 미국 사회를 구현하는 명쾌한 팝아트, 상업 회화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미국의 자본주의와 ‘대중문화’가 가지는 대량소비가 아닌 인류, 진부, 공허함이 표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보편성을 구한 그의 작품은 그 자신이나 대중이 매일 접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매스미디어와도 관련이 있으며, 또한 사고와 죽음의 이미지도 그려졌다.
워홀은 자신에 대해 물었을 때, “나를 알고 싶다면 작품의 표면만 봐 주세요.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며 철저하게 ‘예술가의 내면’을 없애고 표면적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유명한 것에 애정을 숨기지 않고, 스타와 정치인이나 사고, 패션 제품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으며, 그것이 유명하고 또 내 자신도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또한 그 자신이 미국의 유명인이 되고 나서도 걸음을 흩트리지 않고, 유명인을 연출하여 작품을 제작하고 유지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실크 스크린 [ 편집 ]
초기에는 아크릴 물감 등으로 캔버스에 그렸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판화의 실크 스크린 프로세스를 많이 사용하였다. 공판 인쇄인 실크 스크린 프로세스의 원리는 평평한 “프린트 고코”와 같은 것으로, 작가가 직접 인쇄에 종사하지 않아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대량생산에 적합한 기술이다. 그는 기계로 만들어 내듯 실크 스크린 작품을 찍어내는 아틀리에 《팩토리》를 마련하여 많은 젊은이를 고용하여 제작에 종사하게 했다. 한편, 같은 판을 사용하여 의도적으로 프린트를 늦추거나 잉크를 많이 쓰게 했다. 실크 스크린 모티브로 한 것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그가 만드는 초상화는 당시 고액을 받는 유명 인사들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많은 유명인이 자신의 모습을 프린트하기를 원했다.
영화 [ 편집 ]
실크 스크린 프린트를 제작 한편 1963년부터 1968년에 걸쳐 60편 이상의 영화도 다루었다. 그러나 실험영화 같은 작품으로 일반에 알려진 것은 적다. 처음 공개된 작품은 1966년 《첼시 걸즈》이며, 가장 유명한 것은 잠자는 남자를 5시간 동안 계속 비춰주는 《잠》(Sleep)(1963년)이라는 작품이다. 그는 액션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고 (본질적으로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차이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영화가 “근본적으로 같을 뿐만 아니라, 세세한 부분까지 완전히 똑같은 것”을 원했다. 끝없이 변화가 없는 영상은 보편적인 것을 테마로 한 워홀의 관점에서 보면 이상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후에도 영화 제작을 하였고, 극 영화도 제작하였다. 뉴욕의 유명 호텔 “첼시”를 무대로, 각 객실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임의의 2방만 적절한 시간을 선택하여, 2개의 화면을 이용하여 무작위로 계속 비춰주는 (도중 한쪽 스크린은 니코의 모습이 임의로 삽입된다), 《첼시 걸즈》(1966년)는 미국에서 출판에서 대히트를 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전의 작품은 완전히 다른 조 달레산드로(Joe Dallesandro)와 우도 기어(Joe Dallesandro)를 주연으로 한 《악마의 죽음》(1974년)와 《처녀의 생피》(1975년) 등 공포 영화 감독도 시도하였다.
책 [ 편집 ]
앤디 워홀의 철학The Philosophy of Andy Warhol(From A to B & Back Again)(1975) (2007) 열린책들 김정신 옮김 9788990641175
앤디 워홀 일기The Andy Warhol’s Diaries(1989) (2009) 열린책들 홍예빈 옮김 9788990641380
갤러리 [ 편집 ]
오슬로 샵의 디자인
앤디 워홀 박물관
수프 캔
워홀 미술관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앤디 워홀 그리고 팝아트展 – 더프리뷰
이 외에도 둥근 얼굴에 악동 같은 표정을 담은 순진하지만 익살스러운 소녀와 강아지, 고양이와 같은 동심을 담은 일본의 네오 팝 세대 대표 작가이자 현대미술을 이끌어 가고 있는 오시토모 나라, 맨손 페인팅이라는 독창적 페인팅 스타일로 세계 미술시장에서 순수하고 개성 넘치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일본의 아야코 로카쿠, 톡톡 튀는 다양한 캐릭터와 화려한 컬러의 작품으로 떠오르는 캐서린 번하드, 크래쉬, 퓨어이블, 마이코 코바야시 등 자신만의 기법과 스토리로 전 세계를 무대로 팝아트의 부흥을 이끌어 가는 작가들의 작품을 2차에 걸쳐 3주 동안 원화 및 판화, 오프셋 프린트로 만나볼 수 있다.
‘미국 팝아트의 제왕’으로 불리는 앤디 워홀의 대표작 <마릴린 먼로> 시리즈부터 <캠벨수프>까지 앤디 워홀의 작품을 중심으로 만화와 광고 이미지 같은 독자적 스타일의 작품으로 팝아트 시장을 이끌어가는 또 다른 미국의 대표 팝아트 화가 로이 리히텐슈타인, 현재 한국 미술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영국 출신 줄리안 오피의 단순하고 원색적인 픽토그램의 미니멀한 피사체 작품까지 한데 만나볼 수 있다.
무라카미 다카시는 ‘일본의 앤디 워홀’로 불리는 일본의 대표적 현대 미술가이자 팝 아티스트로, 화려한 컬러의 웃고 있는 꽃, 도라에몽 같은 캐릭터 성격의 작품으로 일본의 전통미술에서 벗어나 만화와 애니메이션 등 현대미술의 기법과 결합시켜 조각, 패션, 제품 등 순수미술과 상업미술을 작업하고 있으며 루이 뷔통과 같은 대기업과도 협업하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일본 화가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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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그리고 팝아트展
‘팝아트의 거장부터 떠오르는 뉴스타까지’ 인사동에서 팝아트를 만난다
2021.12.22~2022.1.17 인사아트프라자갤러리 1F
[더프리뷰=서울] 김영일 기자 =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관장 허성미)에서 특별 기획한 <앤디워홀 그리고 팝아트展>이 총 3주간 (1차: 12. 22-27 / 2차: 2022. 1. 5-17) 인사아트프라자갤러리 1층에서 선을 보인다.‘미국 팝아트의 제왕’으로 불리는 앤디 워홀의 대표작 <마릴린 먼로> 시리즈부터 <캠벨수프>까지 앤디 워홀의 작품을 중심으로 만화와 광고 이미지 같은 독자적 스타일의 작품으로 팝아트 시장을 이끌어가는 또 다른 미국의 대표 팝아트 화가 로이 리히텐슈타인, 현재 한국 미술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영국 출신 줄리안 오피의 단순하고 원색적인 픽토그램의 미니멀한 피사체 작품까지 한데 만나볼 수 있다.
앤디워홀 ‘마릴린 먼로’ 실크스크린
앤디 워홀은 대중의 아이콘이었던 마리릴 먼로와 같은 유명 배우의 초상,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 캠벨수프와 같은 상품의 이미지를 강렬한 컬러의 실크스크린으로 제작, 반복적으로 배치한 작품으로 반회화 작업을 통해 대량생산, 소비주의, 상업주의 등 미국 문화의 속성을 담은 팝아트로 각인시켰다.
리히텐슈타인 ‘Crying Girl’ 1964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미국의 팝 아티스트로 대중광고와 만화책에서 영감을 얻어 강렬한 원색의 컬러와 단순화된 인물 표현, 마치 만화책의 한 장면 같은 두꺼운 윤곽선, 형태를 메우고 있는 작은 원색의 점(Benday Dots)들과 작품 속에 등장하는 짧은 텍스트, 익살스러운 표현 등 독보적 스타일과 특징으로 첫 개인전부터 대중들의 관심과 함께 대성공을 거두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지금까지도 앤디 워홀과 함께 미국의 팝아트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작가로 손꼽히며 말년에는 팝아트로 시도하는 누드 작품 등 만화풍의 작품들을 통해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무라카미 다카시 ‘Poporoke Forest’ 2011
무라카미 다카시는 ‘일본의 앤디 워홀’로 불리는 일본의 대표적 현대 미술가이자 팝 아티스트로, 화려한 컬러의 웃고 있는 꽃, 도라에몽 같은 캐릭터 성격의 작품으로 일본의 전통미술에서 벗어나 만화와 애니메이션 등 현대미술의 기법과 결합시켜 조각, 패션, 제품 등 순수미술과 상업미술을 작업하고 있으며 루이 뷔통과 같은 대기업과도 협업하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일본 화가 중 하나이다.
무라카미 다카시, Doraemon: Thank You
줄리안 오피
이 외에도 둥근 얼굴에 악동 같은 표정을 담은 순진하지만 익살스러운 소녀와 강아지, 고양이와 같은 동심을 담은 일본의 네오 팝 세대 대표 작가이자 현대미술을 이끌어 가고 있는 오시토모 나라, 맨손 페인팅이라는 독창적 페인팅 스타일로 세계 미술시장에서 순수하고 개성 넘치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일본의 아야코 로카쿠, 톡톡 튀는 다양한 캐릭터와 화려한 컬러의 작품으로 떠오르는 캐서린 번하드, 크래쉬, 퓨어이블, 마이코 코바야시 등 자신만의 기법과 스토리로 전 세계를 무대로 팝아트의 부흥을 이끌어 가는 작가들의 작품을 2차에 걸쳐 3주 동안 원화 및 판화, 오프셋 프린트로 만나볼 수 있다.
로카쿠 ‘Magic hand(Banana)’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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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앤디 워홀, 그의 ‘외상적'(the Traumaitc) 팝아트
곧이어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앤디 워홀의 작품에 나타나는 주제의식의 이중성―당대 미국의 소비주의 사회가 제공하는 물화의 이미지를 수용하면서도, 그런 이미지를 통해 미국 이데올로기의 물질만능주의적인 성격을 역설적으로 가장 잘 보여준다는 점―은 자본주의 세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진짜 실재로서 이러한 폭력적인 결과들을 작품에 끌어오는 혁신을 창출한다. 권력층에 의해 자의적으로 규정된 가짜 실재를 경유해 진짜 실재를 선보임으로써 자신이 믿어왔던 세계가 무너지는 체험을 당대인들, 특히 후자에 속하는 개인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앤디 워홀이 발을 담그고 있었던 후기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는 그 자체가 그릇된 실재면서 세계에 대한 진실된 이미지를 충격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할 외상적 실재였던 셈이다. 하지만 뒤이어 살펴보겠으나, 이러한 외상적 실재는 일시적으로 직시된다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끊임없이 보급되는 값싼 대중문화의 산물들로, 혹은 유사한 방식으로 사회가 개인에게 주입하는 이데올로기적 정상성을 받아들여 이들은 외상으로 인해 겪었던 충격을 망각한다. 그럼에도 모종의 계기로 진짜 실재들을 계속 접하게 되면서 개인은 실재들이 가져오는 충격에 오히려 익숙해져, 그러한 충격을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으로 단정하게 된다.
“재난 시리즈”(Death and Disaster Series), “DIY”, “엘비스”, “마릴린 먼로” 등 앤디 워홀은 당대 미국 사회의 핵심적인 산업 동력이었던 기계들이나 대중문화를 상징한 유명 인물들을 연작 팝아트의 주제로 선택하기도 했다. 이때 워홀이 사용했던 물질적 창작 기법은 실크스크린 기법이었다. 이는 공판화를 이용한 판화 기법으로, 다른 판식에 비해 잉크가 많이 묻기에 강력한 색상과 선명한 색감을 선보일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색감을 선명하게 뽑아낼 수 있어 단순명쾌하고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연출할 수 있기에, 대형 포스터나 광고용 전단지 등 상업 미술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돼왔던 기법이다. 해당 기법을 작품 창작을 위한 수단으로 선택했다는 사실로부터 앤디 워홀이 상품의 영역과 예술의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았던 당대 사회의 흐름에 동참했다는 것을 일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의 실크스크린 작품들이 “캠벨 수프 통조림”에서와 마찬가지로 함의하고 있는 외상적 반복의 실태들을 분석하게 되면, 그가 단순히 사회적 흐름에 동참한 것이 아니라 그런 흐름에서 읽어낼 수 있는 미국 이데올로기의 허황을 가감 없이 폭로하고 있음을 이차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핼 포스터의 외상적 실재론을 적용하게 되면, 이 때문에 워홀의 입장에서 ‘가짜’로 표상된 자본주의 세계는 더욱 공고해져 간다. 대중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의문을 제기할 틈도 없이 자극적인 연속극과 코미디언들의 쇼, 시각적인 재미를 강조한 뮤지컬들이 쏟아지면서 국가 측은 이런 작품들을 자유롭게 감상하며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개인에게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즐길 거리도 살 것도 풍요로운 동시에 이 모든 상품을 개인의 능력이 허용하는 한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자유로운 미국 시민’의 이미지를 쌓아나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흥거리를 즐기지 못하고 당장의 생계를 고민해야 하는, 자본주의에서 버려진 가난한 이들의 삶은 가려진다. 자본주의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경쟁 체제에서 생존하지 못한 사람들의 고통이나, 자본주의의 논리에 잠식돼 이윤을 창출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무가치하다고 쉽게 단정하는 이들의 비인간적인 면모는 표상된 실재의 세계에서 철저하게 가려진다.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존재 자체가 그 사회에서 지워지기 마련이며,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 인간성을 잃고 있다는 자각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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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앤디 워홀, 그의 ‘외상적'(the Traumaitc) 팝아트
1.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의 예술가, 앤디 워홀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은 20세기 중후반을 대표하는 미국의 상업미술가 중 한 명으로, 그 자신의 독창적인 미술 기법인 ‘팝아트’로 유명세를 얻은 인물이다. 팝아트란 ‘대중 예술(Popular Art)’을 가리키는 용어로, 해당 사회에 보급된 매스미디어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반(反)예술적 미술 사조를 뜻한다. 이 사조는 기존의 예술이 옹호했던 낭만주의적 가치, 다시 말해 ‘예술다운 것’을 지향하는 행위를 배격하고 현재 사회에서 포착되는 윤리적인 문제들을 예술을 통해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0세기의 대표적인 팝아트 선구자로서 앤디 워홀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1960-1980년대 미국 문화에 내재된 상품주의와 소비주의의 향락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렸던 기존의 회화 작업 방식과 달리, 워홀은 영화배우 등 유명인을 아이콘의 초상 형태로 만들거나 공산품의 상품 이미지를 기계적으로 양산하는 등 상품문화의 대표 격인 인물들과 사물들을 예술로 끌어들이고자 노력했다. 이로써 냉전 체제가 지속되던 와중, 미국에서 신자유주의 및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제일의 원리로 격상되던 시기에 미국 사회의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었던 소비중심주의, 황금만능주의의 단상을 공격적으로 포착했다.
2. 앤디 워홀의 ‘외상적’(the Traumatic) 팝아트
정신분석학적 연구에서 ‘외상’(Trauma)이란 인식 주체가 내부 혹은 외부에서 얻은 강력한 자극으로 인해 정신적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정신분석학 용어사전에 의하면 “이때 [주체의] 자극 장벽이나 보호막이 깨어지고, 자아는 압도되어 중재 능력을 상실한다.” 이러한 외상적 경험들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외상에 대한 자아의 대처 능력을 떨어뜨리게 한다. 결과적으로 주체는 원래 직시하고 있던 눈앞의 현실에서 멀어져, 현실 이면에 존재할 잠재적인 위협을 우려하며 외상이 다시금 발현할 수 있으리란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
앤디 워홀의 팝아트는 이와 같은 외상적 특징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그가 활동하던 시기 미국 소비문화에 내재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다. 공산품을 대량으로 복제한 이미지나 미국 대도시의 풍경을 담아낸 사진들을 콜라주 형태로 덧붙인 이미지를 통해, 워홀은 미국이 전세계에 자랑하던 자국의 ‘수준 높은’ 대중문화가 사실은 농도 짙은 상업성으로 무너진 개인의 윤리관을 전시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2.1. 핼 포스터의 외상적 실재론
핼 포스터가 1996년에 미술학계에 제시했던 외상적 실재론은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논의에 그 모태를 두고 있다. 포스터가 설명하길 라캉은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로서 인간이, 언제나 자신이 거주하는 ‘상징계’(the Symbolidc)의 바깥에 존재한다고 본다. 즉, 라캉의 시선에서 우리의 현실은 온갖 상징과 규정으로 가득한 세계다. 특정한 정상성에 부합하는 사회 구성원을 길러내기 위한 규범과 정의(definition)들로 채워졌다는 것이다. 인간 주체는 상징을 받아들이는 존재로서 상징계 바깥에 서서, 상징계에 존재하는 ‘가짜’ 실재를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진짜’ 실재(the Real)를 마주할 수 있는 가능성에 발을 딛고도 있다는 논지다. 라캉에 의하면 이러한 진짜 실재와 주체와의 만남은 ‘어긋난’ 형태로만 가능하다.
이를테면 “개인은 자유롭게 부를 축적할 권리가 있다”라는 등 자본주의의 긍정적인 면모를 강조한 경제 가치관으로 상징되는 ‘가짜’ 실재 이면에,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개인이 이윤 창출의 수단으로 전락한다는 ‘진짜’ 실재가 존재한다. 개인은 평소에 가짜 실재만을 보며 자본주의 사회의 충실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며 그편이 옳다고 믿지만,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진짜 실재인 사회의 상흔을 목격함으로써 자신이 믿었던 가치가 잔인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외상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어긋난 만남으로도 실재는 외상을 일으킨다. 즉 실재는 외상적이고, 외상의 충격은 실재의 존재를 확증한다.”
이때의 만남이 어긋난 만남인 이유는, 정상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평소 상황에서는 그런 외상을 겪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외상이라는 신경증적 현상이 동원되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개인은 실재 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실재를 마주할 수 있다. 가짜 실재가 정상으로 제시되는 세계에서, 진짜 실재는 “[현실 속에] 재현될 수 없고, 단지 [외상적 경험을 통해] 반복될 수만 있을 뿐이며, 반드시 반복되고 만다.” 핼 포스터는 외상적 실재론의 핵심이 이처럼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매개된 어긋난 만남을 반복함으로써 외상의 충격을 끊임없이 재생산해, 진짜 실재를 계속 개인 앞에 내놓는 것에 있다고 주장했다. 한 번 충격을 입은 주체는 다시 일상을 평범하게 살아가더라도, 조금이라도 유사한 체험을 할 때마다 똑같은 외상을 여러 번 직면하면서 그 외상에 익숙해지는 동시에 다시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외상을 입히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2.2. 외상적 실재로서 미국의 후기 자본주의 사회
포스터에 따르면 앤디 워홀의 작품은 이러한 외상적 실재성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실재로부터 외상적 충격을 받은 주체가 반복을 통해 그 충격을 완화시키면서 실재를 회피하려고 하는 동시에, 반복을 통해 그 충격을 유발하면서 실재를 제시하기도 하는 작업”을 완성했다. 이때 충격을 주는 외상적 실재의 배경은 미국 후기 자본주의에 내재된 산업화, 표준화의 논리에 있다. 냉전으로 인한 소련과 미국의 대립이 격화되고, 두 초강대국의 이데올로기 싸움이 지속됐던 1960-1980년대에 워홀은 미국이 대외적으로 부의 상징이자 발전 국가의 모범으로 여겨졌던 ‘가짜’ 실재 뒤에 존재하는 ‘진짜’ 실재, 다시 말해 산업화의 논리에 매몰돼 인간적 감수성을 잃고 상품화와 자본을 찬미했던 양상을 작품으로 들춰냈다.
워홀의 눈에 비친 당대의 미국은 대외적으로 냉전의 최전선을 대표하는 강대국이었다. 자본주의는 미국이 냉전의 한가운데에서, 성공적인 근대화를 이뤄 부국이 될 수 있었던 강력한 지표로 쓰였다. 오드 아르네 베스타에 따르면 “미국 엘리트는 미국의 핵심 ‘국익’이 서로 다른 방법을 통해 자유로운 시장을 세계로 확장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대통령은 시장의 자율성을 보호하고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를 최대한으로 보장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여겼다. 이윤을 정당한 수단을 동원한다는 전제 아래 무한대로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로 상징됐다. ‘자유로운’ 미국 국민은 국가의 규제나 계급적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나 부유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의 시대에서 살아가기에, 자유로운 존재로 천명됐다. 베스타가 지적했듯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장의 신격화는 미국 대외 정책 이데올로기의 자본주의적 요소가 가장 극단적 형태로 나타난 결과물이었다.”
미국은 이처럼 자본주의를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전시하면서, 자국의 영향력을 제고해 소련을 견제하고자 1950년대 중반부터 제3세계와의 외교와 해당 지역 국가를 겨냥한 원조 정책을 펼쳤다. 이 가운데에서 자본 축적의 원리와 소비주의의 위상은 지나치게 격상됐고, 한 사회를 규율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자본주의를 감당하기 위해 미국은 자국 내에서 그러한 이데올로기들이 묻어난 흔적들을 공격적으로 대중에게 선보일 수밖에 없었다. 대중문화 전반에 값싼 오락물을 대량으로 보급했던 것이 그 예시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등 방송 매체가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질보다 양’을 우선시한 영화·코미디 쇼 등의 프로그램이 무수히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간편식 음식처럼 저렴한 공산품들이 소비 시장에 쏟아지기도 했다.
핼 포스터의 외상적 실재론을 적용하게 되면, 이 때문에 워홀의 입장에서 ‘가짜’로 표상된 자본주의 세계는 더욱 공고해져 간다. 대중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의문을 제기할 틈도 없이 자극적인 연속극과 코미디언들의 쇼, 시각적인 재미를 강조한 뮤지컬들이 쏟아지면서 국가 측은 이런 작품들을 자유롭게 감상하며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개인에게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즐길 거리도 살 것도 풍요로운 동시에 이 모든 상품을 개인의 능력이 허용하는 한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자유로운 미국 시민’의 이미지를 쌓아나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흥거리를 즐기지 못하고 당장의 생계를 고민해야 하는, 자본주의에서 버려진 가난한 이들의 삶은 가려진다. 자본주의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경쟁 체제에서 생존하지 못한 사람들의 고통이나, 자본주의의 논리에 잠식돼 이윤을 창출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무가치하다고 쉽게 단정하는 이들의 비인간적인 면모는 표상된 실재의 세계에서 철저하게 가려진다.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존재 자체가 그 사회에서 지워지기 마련이며,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 인간성을 잃고 있다는 자각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곧이어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앤디 워홀의 작품에 나타나는 주제의식의 이중성―당대 미국의 소비주의 사회가 제공하는 물화의 이미지를 수용하면서도, 그런 이미지를 통해 미국 이데올로기의 물질만능주의적인 성격을 역설적으로 가장 잘 보여준다는 점―은 자본주의 세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진짜 실재로서 이러한 폭력적인 결과들을 작품에 끌어오는 혁신을 창출한다. 권력층에 의해 자의적으로 규정된 가짜 실재를 경유해 진짜 실재를 선보임으로써 자신이 믿어왔던 세계가 무너지는 체험을 당대인들, 특히 후자에 속하는 개인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앤디 워홀이 발을 담그고 있었던 후기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는 그 자체가 그릇된 실재면서 세계에 대한 진실된 이미지를 충격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할 외상적 실재였던 셈이다. 하지만 뒤이어 살펴보겠으나, 이러한 외상적 실재는 일시적으로 직시된다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끊임없이 보급되는 값싼 대중문화의 산물들로, 혹은 유사한 방식으로 사회가 개인에게 주입하는 이데올로기적 정상성을 받아들여 이들은 외상으로 인해 겪었던 충격을 망각한다. 그럼에도 모종의 계기로 진짜 실재들을 계속 접하게 되면서 개인은 실재들이 가져오는 충격에 오히려 익숙해져, 그러한 충격을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으로 단정하게 된다.
2.3. 상품 이미지 차용을 통한 ‘미국적인 것’의 표면적 수용
양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체제가 도래하기 시작했을 때, 미국은 20세기가 도래하기 전까지 유럽이 쥐고 있었던 예술계의 주도권을 자국으로 가져오고자 노력했다. 유럽에서는 점차 모더니즘 미술, 즉 시각적 유사성을 중요한 요소로 여겼던 이전까지의 회화를 거부하면서 실제 세계의 재현을 포기하는 ‘유럽 아방가르드’가 시작됐던 시기였다. 양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에 돌입하려고 했던 바로 그 시기에, 미국은 유럽 정신사의 산물인 예술을 자국 문화에 들여옴으로써 정신적인 차원의 열등의식을 극복하려던 생각이었다.
이에 분업의 원리에서 유리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던 유럽의 순수 미술에 대항하는 격으로, 미국은 자국의 근대성을 표현할 수 있는 예술의 하위 영역으로 회화를 지목했다. 잭슨 폴록이 속한 추상표현주의 사조가 그 증거다. 특히 드립 페인팅 기법으로 그렸던 폴록의 작품들은 ‘미국적인 것’을 대변하기에 알맞았다. 1948년에 마셜 플랜이 시작된 이후, 본격적인 냉전이 시작되고 있었던 때 미국은 ‘미국적인’ 색깔, 다시 말해 “그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는 듯한 해방된 감성을 자랑하는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보여줄 수 있는 여러 문화 생산물들을 세계 곳곳에 전파해 자국의 위상과 영향력을 드높이려고도 했다.
이처럼 ‘미국만의’ 예술을 확립하려는 강박에 휩싸이면서 미국은 폴록을 시작으로 다양한 예술 분야를 ‘전략적으로’ 육성했던 것이다. 가짜 실재가 난무하는 자본주의 세계를 예찬하고자 또 다른 가짜인 실재로 미술을 간주한 결과다. 이 때문에 미국이 내세웠던 미국적인 미술작품에는 뚜렷한 형체가 없다. 온갖 종류의 물감으로만 화면을 채웠던 잭슨 폴록의 페인팅 작품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캔버스에서 특정한 사물이나 사건의 현장, 인물 등의 대상이 부재한 상태를 미국의 문화정책 전문가, 비평가들은 자의적인 의미를 불어넣을 수 있는 여지로 해석했던 것이다. 재현적인, 고정된 사물 없이 형형색색의 물감만 난무하는 캔버스의 화면은 미국적인 자유로움을 대변할 수 있는 근거로 채택됐다.
“…그가 1963년 맨해튼의 이스트 47번가에 차린 작업실 이름은 적절하게도 ‘공장’(Factory이었다. 예술의 산업화 혹은 예술과 문화산업의 상호 침투를 예견하는 명명이다. 이 공장에서 워홀은 상품―이미지 세계 속의 새로운 존재 방식을 드러내고 펼쳐냈다. 명예가 유명세 아래, 뉴스 가치가 악명 아래, [예술작품의 숭고함이 빚어내는] 아우라가 화려함 아래, 그리고 카리스마가 과장 광고 아래 포섭돼버리는 세계에서 그는 현장의 제보자로서 … 잊을 수 없는 이미지들을 찾아내는 안목을 감추고 있었다.” (조주연, “현대미술강의” 중)
이런 상황에서 앤디 워홀은 자본주의 사회가 부추기는 상품사회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차용해 ‘잘 팔리는’ 예술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핵심은 제품의 겉면 포장이나 제품 자체, 혹은 사람의 초상을 찍은 사진 등 복제된 이미지를 즐겨 썼다는 것에 있다. 당대 미국은 형상이 없는 추상미술처럼 미국의 자본주의적인 모습들을 감출 수 있는 미술 사조를 선호했다. 하지만 워홀의 창작 기법이 보여주는 것은 정확히 그 반대에 위치했다. 그에게 미국 사회는 외상적 실재를 작동시킬 장이었기에 오히려 미국의 상품사회가 제공했던 저급 대중문화 TV 프로그램이나 공산품 디자인의 이미지를 공격적으로 활용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예술과 문화산업, 즉 고급 산물과 저급 산물 사이의 경계를 흐려서 주체가 외상을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했던 것이다.
워홀의 작품 세계관은 가짜 실재를 미술의 핵심 재료로 삼아 가짜 실재 이면의 실재를 외상을 일으키는 방식, 부연하자면 개인에게 자신이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현실이 자본과 물질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가면으로 위장된 공간임을 깨닫게 해 충격을 선사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런 점에서 워홀의 예술작품은 그가 엄격하게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냉전이 절정에 다다르던 시기 미국이 전세계의 모범 국가로 자처하면서도 끝내 지울 수 없었던 모순점을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이다.
3. 팝아트 속 외상의 반복적 발현: 미국 이데올로기의 폭력적 이면
이때 핼 포스터는 앤디 워홀의 창작 기법이 외상적 리얼리즘의 차원에서 ‘충격 받은 주체성’과 ‘강박적 반복’이라는 테제를 따라간다고 주장한다. 포스터에 따르면 워홀의 테제는 물화된 세계에 익숙해진 비주체성(nonsubjectivity)의 인물 배후에, 그렇게 충격을 경험하게 하는 어떤 주체가 존재해야 함을 우선적으로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충격을 받은 주체란 현실 세계에서는 모순어법에 해당한다. 이때의 충격은 자본주의 사회에 결함이 존재한다는 자각을 제공하는데, 가짜 실재의 세계에서는 이를 누군가 자발적으로 제공하려는 사람들이 극히 드물다.
따라서 이런 배후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절대로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포스터는 외상적 사건을 반복적으로 캔버스에 드러내는 워홀의 창작 방식이 프로이트가 규정했던 것처럼 이미지를 단순히 복구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워홀의 반복은 단순히 외상의 결과들을 재생산하기만 하지 않고 외상의 결과들을 직접 그 자신이 ‘생산하는’ 차원으로 나아간다.
3.1. 작품 ①: “캠벨 수프 통조림”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 롤랑 바르트(1915-1980)에 따르면 앤디 워홀의 팝아트는 예술의 가치를 전혀 다른 차원의 것으로 바꿨다. 팝아트의 미술사적 가치, 나아가 역사적 가치는 모멸적이라 규정된, 이를테면 저급 대중문화 범주로 보급된 문화 생산물의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이용하는 것에서 나온다. 이런 이미지들의 경우 그 자체로는 “단지 진부한 방법론이나 제작 방식에 따라 끊임없이 똑같은 형태를 만들어내며 재생산될 뿐인, 무의미하고 공허한 생산물”에 불과하지만, 그런 속성 때문에 누군가가 이미에 특정한 함의들을 불어넣고자 넣고자 할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 지시체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이미지의 예시로 사진을 든다.
그는 사진이 실제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회화와 빈약하게 연결고리를 만들어 오던 와중, 팝아트의 등장으로 사실성에 기인해야만 했던 한계점에서 벗어나 팝아트가 탄생하는 기원으로 격상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사진 매체를 이용해 팝아트의 지시체적 성격을 온전히 드러낸 예술가로 앤디 워홀을 지목한다. 워홀은 동시대 미국이 대내외적으로 자국의 이데올로기를 정상 국가의 모델로 제시했던 가운데, 자본주의 세계관이 감추고 있었던 내적 폭력성을 오히려 자본주의 세계관이 전면에 내세우는 대중문화의 사진적 이미지를 이용해서 폭로한다는 것이다.
“워홀의 매력은 이 배후[외상을 제공하는 것]의 주체에 관해 누구도 결코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충격받은 주체성과 강박적인 반복이라는 이러한 개념들은 워홀의 페르소나와 이미지들에서 반복이 맡은 역할을 재설정해 준다. … ”『팝피즘(POPism)』에서 워홀은 따뜻함과 반복, 지배에 대한 이런 포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나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똑같은 것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 정확히 똑같은 것이 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정확히 똑같은 것을 보면 볼수록, 의미는 점점 더 사라지며, 느낌은 점점 더 좋아지고 점점 더 무심해지기 때문이다.” (핼 포스터, “실재의 귀환” 중.)
이러한 폭로는 ‘반복’을 통해 가능해진다. 외상적 실재를 개인 앞에 끊임없이 내놓음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개인은 처음 외상을 겪었을 때 느꼈던 충격을 잊지 못하고, 비슷한 이미지를 마주칠 때마다 이전에 겪었던 고통을 떠올린다. 반복적으로 외상을 체험하게 되면서 충격에 무뎌지고, 유사한 체험을 하는 것에 익숙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앤디 워홀을 비롯한 외상적 실재론자들은 오히려 이렇게 외상적 경험에 익숙해졌다고 스스로 생각함으로써, 익숙해진 충격을 현실에 무의식적으로 아무렇지 않은 것인 마냥 드러내는 과정으로 그 폭력성이 외부에 투사된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반복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가 1962년에 발표한 팝아트 “캠벨 수프 통조림”이 있다. 이 작품은 시중에 판매되고 있던 캠벨 수프 캔의 광고 이미지를 큰 폭의 캔버스에 하나씩 꽉 차게 총 32번 반복적으로 그린 결과물이다. 캔버스에 채워진 캠벨 수프 캔은 저마다 맛을 가리키는 문구들만 다를 뿐, 나머지 세부 사항이 모두 같다.
조주연은 복제된 수프 캔의 이미지들이 “대량 기계생산이면서도 부분적으로 차이를 만들어 획일성을 회피한 생산”인 “수열적 생산”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지적하면서, 이런 수열적 생산과 소비의 이미지가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 곧 앤디 워홀 자신이 소비주의 미국 사회에서 겪었던 외상적 충격들을 회피하는 동시에 직시하고 있는 것이라 주장한다. 1963년에 비평가 진 스웬슨(Gene Swensen)과 진행했던 인터뷰에서 앤디 워홀은 과거 20년 동안 매일같이 캠벨 수프를 점심으로 먹어왔다고 밝히면서, 이 작품이 캠벨 수프라는 공산품 이미지를 위시하면서 생활의 곳곳에 매일 먹은 캠벨 수프처럼 일상적으로, 익숙하게 침투해 있는 자본주의 산업화의 논리들을 짚어내고 있음을 암시한다. 매일 가공된 질 낮은 간편 식품을 먹어야 하는 삶은 분명 고통스러운 경험인데도, 그런 삶을 반복하게 되면서 앤디 워홀은 소비주의 사회의 폭력성을 일상의 일부로 수용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충격을 반복함으로써 감정을 표면적으로 완화한 셈이다.
그렇기에 “캠벨 수프 통조림”은 워홀의 삶을 지배하는 수열적 생산과 소비의 질서를 그대로 반복하는 작품인 동시에, 각기 다른 영역에서 비슷한 반복을 행하며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사회적 구성원상에 맞춰 살아가는 당대 미국 사회의 모든 개인의 암울한 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미국식 자유 이데올로기로 포장된 사회의 겉은 이윤의 추구가 끝없이 보장되고 즐길 유흥 거리가 넘쳐나는 역동적인 세계로 비치지만, 그런 가짜 실재 이면에는 워홀이 “[자본주의의 폭력적인 성격을] 타파할 수 없다면 [그것에] 가담하라고” 사회가 암묵적으로 시사하듯 “[개인이] 반복에의 강박에 전적으로 가담”하게 돼 “그 반복을 [무의식적으로] 폭로”하는 원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 체제에 저항할 수 없는 개인은 자본주의 사회가 최우선시하는 물질적 가치들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수반되는 고통 역시 반복을 통해 강제적으로 익숙해져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앤디 워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포함한 당대 미국의 구성원들은 이처럼 자본의 논리가 관통되는 사회가 ‘쾌적한’ 공간이라 믿으며 자기 최면을 걸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그랬는데, 내 삶이 나를 지배해왔다는 거예요. 나는 그 생각이 마음에 들었어요.” 핼 포스터가 논했던 외상의 경험이 본 작품을 통해 반복적으로 가짜 실재의 세계에 지속적으로 침입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은 자신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자본주의 시장의 폭력성을 무의식중에 내보이면서, 그런 논리가 공동체 보편의 덕목으로 제시되는 냉전 시기의 미국 사회를 비판하는 역설을 빚는다.
3.2. 작품 ②: “실크스크린 연작들”
“재난 시리즈”(Death and Disaster Series), “DIY”, “엘비스”, “마릴린 먼로” 등 앤디 워홀은 당대 미국 사회의 핵심적인 산업 동력이었던 기계들이나 대중문화를 상징한 유명 인물들을 연작 팝아트의 주제로 선택하기도 했다. 이때 워홀이 사용했던 물질적 창작 기법은 실크스크린 기법이었다. 이는 공판화를 이용한 판화 기법으로, 다른 판식에 비해 잉크가 많이 묻기에 강력한 색상과 선명한 색감을 선보일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색감을 선명하게 뽑아낼 수 있어 단순명쾌하고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연출할 수 있기에, 대형 포스터나 광고용 전단지 등 상업 미술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돼왔던 기법이다. 해당 기법을 작품 창작을 위한 수단으로 선택했다는 사실로부터 앤디 워홀이 상품의 영역과 예술의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았던 당대 사회의 흐름에 동참했다는 것을 일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의 실크스크린 작품들이 “캠벨 수프 통조림”에서와 마찬가지로 함의하고 있는 외상적 반복의 실태들을 분석하게 되면, 그가 단순히 사회적 흐름에 동참한 것이 아니라 그런 흐름에서 읽어낼 수 있는 미국 이데올로기의 허황을 가감 없이 폭로하고 있음을 이차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재난 시리즈”는 말 그대로 교통사고의 현장, 죽은 사람의 해골,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기계 등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난의 현황을 반복적인 이미지로 한 화면 안에 묘사한 작품이다. 워홀은 교통사고의 현장을 찍은 사진 이미지를 가져와, “캠벨 수프 통조림”을 창작했던 것처럼 캔버스 안에 하나의 이미지를 여러 번 반복해 그려 작품을 완성한다. 그가 작품에 복제해 넣은 사고 현장은 시신의 혈흔이 묻어 있고 파손된 자동차가 적나라하게 모습을 보이고 있는 등, 정돈되지 않은 형태로 관람 주체에게 전시된다. “DIY”는 자본주의 산업 사회에서 기성품을 빠르게 만들기 위해 공장에 동원되는 기계를 암시하는 이미지의 반복으로 만들어진 그림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마릴린 먼로 등 저명한 문화계 인물의 초상 사진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채워 넣은 작품들도 존재한다. 이처럼 특정 인물이나 사물, 현상을 여러 번 복제해 만든 팝아트는 관람객들에게 외상의 경험을 위한 매개체로 끊임없이 자리한다.
예컨대 “재난 시리즈”를 통해 개인은 죽음의 상황을 떠올리면서, 유사한 경험을 실제 현실에서 하게 될 수 있으리라고 순간적으로 두려워한다. “앰뷸런스 재난”이라는 연작 중 한 편에서 감상 주체는 앰뷸런스 차창 밖으로 널브러진 희생자의 머리에 내리꽂힌 수직의 얼룩을 바라보며, “실재의 힘, 즉 우리가 평상시에는 ‘문명의 이기’라며 자동 기호화하는 현대 기계 문명 사회의 ‘오토마론’(편리, 속도, 쾌적, 여행 등등) 뒤에 도사린 실재의 위협을 순간적으로 드러내는 ‘투케’”를 경험한다. 하지만 이내 그림에서 눈길을 거둬 공포를 느끼는 현장에서 벗어나지만, 죽음을 연상케 하는 사건을 반복적으로 마주하면서 계속 외상의 충격을 겪게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 체험에 무뎌지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죽음의 이미지는 앤디 워홀이 의도한 바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로 포착되는 인격의 죽음을 암시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개인은 여러 번 자신의 인격이 비인간적인 소비주의 문화 속에서 격하되는 충격을 반복하며 상품사회의 향락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들어, 인격적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논지다.
마릴린 먼로와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유명인들의 복제 이미지가 나열된 작품에서도 비슷한 주제의식이 포착된다. 초상 이미지의 반복은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상품화되고 선전되는 그들의 가짜 실재 뒤에 서려 있는 인간성을 가리고, 상품화의 영향을 받은 외관만이 온전한 실재인 것처럼 제시되는 것이다. 상품광고 이미지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한 실크스크린 기법에 의해 말이다. 앞서 살폈던 수프 캔의 작품과 동일하게,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연작은 외상으로 인한 충격이 반복적으로 생산될 수밖에 없는 미국 사회를 눈앞에 선보인다. 이때 외상을 입는 개인은 자신에게 이런 외상을 선사하는 최초의 인물이나 경험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미 사회가 미국적인 것으로 제시한 이데올로기에 충분히 익숙해진 상태여서다.
그래서 워홀이 선택한 재난, 죽음, 기계성, 아이콘화의 모든 이미지는 “현대 산업 문명이 약속하는 스펙터클 사회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들”에 해당한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균열이 드러내는 실재의 충격을 반복적 이미지 생산을 통해 막고자 하지만, 반복되는 이미지는 언제건 진실을 직시하는 투케를 유발할 수 있다. 그렇지만 수십 년간 먹어 온 캠벨 수프의 흔적들, 광고 포스터의 이미지, 오락성만을 겨냥한 대중 매체물 등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보편과 정상성의 굴레 안에서, 결과적으로 모두가 폭력이 만연한 세상에 무뎌지게 된다. 앤디 워홀은 이러한 사회 구조를 팝아트라는 동시대 미술 속에 표현한다.
4. 나가며: 외상 이미지의 발현과 망각: 역설적 구조의 반복
“…워홀은 모든 측면에서 끊임없이 역설을 일으킨다. 그의 작품은 실재를 지시하기 위해 반복되는 충격적인 이미지이기도 하고 그 충격을 은폐하기 위해 반복하는 무덤덤한 스크린이기도 하다. 또한 작가는 실재의 충격에 공감하고 참여하는 주체이기도 하고, 실재의 충격에 냉담하고 무관심안 주체이기도 한데, 이런 역설적 주체 효과는 관람자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되풀이된다.” (조주연, “현대미술강의” 중)
팝아트의 주역으로서 앤디 워홀의 역사적 위상, 구체적으로는 20세기 중후반을 대표하는 몇 안되는 예술가라는 칭호는 그가 미국 사회의 암울한 이면을 독창적인 예술 기법으로 포착했다는 점에서 나온다. 롤랑 바르트는 앤디 워홀의 팝아트가 미국식 이데올로기가 발휘하고 있던 폭력의 비가시화를 “주술적인 반복을 통해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워홀은 동일한 이미지들을 색조나 이미지에 존재하는 특정 문구만 일부 수정해 연속적으로 배치하는 등, 사소하게만 변형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동원해 작품을 제작했다. 이러한 반복성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국면의 일시성으로 변모한다. 워홀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이미지의 반복, 반복을 통한 외상을 재생산하게 됨으로써 자본주의 세계로부터 배제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워홀적인’ 작품 속 대상은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상 자기 자신을 통제하던 가짜 세계의 파토스(pathos), 다시 말해 소비주의 사회의 자본주의적 덕목을 전제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가해지는 구성원들의 규정을 스스로 제거하게 된다. 그 대신에 작품 속 대상은 충격을 주기 위한 진짜 실재의 세계로 편입돼, 일시적일지라도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는 기능을 도맡게 된다.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폭로되는 모순을 직시하며 충격을 받고, 가짜로 만들어진 자의적인 정상성의 세계 이면에 자리한 이데올로기의 폭력적인 구조를 가짜 세계의 바깥에 서서 확인한다. 그러면서도 그 구조를 전복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생산성을 발휘해 금전적 이익을 취득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무력감이나, 사회가 주입하는 각종 기호들에 의해 외상의 경험을 스스로 망각하곤 한다. 앤디 워홀의 작품은 격화되고 있던 냉전의 한 축을 담당한 미국이 스스로를 성공한 근대 국가로 선전하기 위해 자본주의와 소비중심주의, 시장중심주의적 가치관을 어떻게 당대 사회의 구성원에게 강요하고 있었는지 이처럼 외상의 발현과 망각의 반박이라는 역설적인 구도를 통해 보인다.
종합적으로, 앤디 워홀의 작품은 이렇듯 당대 미국 사회의 근본적인 작동 원리를 예술을 통해 정신사적 양상에서 짚어냈기에 ‘역사적 증언’으로서의 가치도 가진다. 유럽을 중심으로 주도됐던 예술계의 흐름이 미국으로 넘어갔던 가운데에서도, 당대에는 여전히 현실 세계와의 연관성을 완전히 제거하고 순수 기호의 세계만을 다룬 모더니즘 예술이 강력하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정 시대의 정치·사회적 양상을 예술작품에 반영해야 한다는 논조가 아직까지 학계의 주된 논점으로 자리하지는 않은 형국이었다.
그럼에도 앤디 워홀은 특히나 상품사회의 원조 격이었던 미국의 자본주의 논리를 미술작품에 그대로 반영해 ‘실제적이면서도 비실제적인’ 예술로 팝아트를 발전시켰다. 대중문화의 상품성과 냉전 시기의 미국이 강조했던 소비주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받음으로써, 워홀은 역설적으로 미국 사회에 내포했던 비인간적인 지점들을 짚어냈다. 특히 그가 작품 제작 과정에서 사진 이미지 형태로 차용했던 상업 광고 포스터, 유명인의 초상, 당대 유행하던 텔레비전과 라디오 오락 프로그램, 공산품 등 대중문화의 다양한 이미지들 역시 그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가치를 끌어 올리는 또 다른 요인이기도 하다.
‘돈 버는 기계’가 된 인간은 아름답다…앤디워홀 팝아트에 …
▲ 1950년대 앤디 워홀이 상업 디자이너로 활동할 때 그린 일러스트 ‘슈즈'(1959) ⓒThe Andy Warhol Foundation
▲ 총격 사건 이후 1970년대부터 워홀은 죽음을 주제로 한 작품에 매달렸다. ⓒThe Andy Warhol Found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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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버는 기계’가 된 인간은 아름답다…앤디워홀 팝아트에 담긴 철학
▲ 1950년대 앤디 워홀이 상업 디자이너로 활동할 때 그린 일러스트 ‘슈즈'(1959) ⓒThe Andy Warhol Foundation
▲ 팝아트 시대의 문을 연 ‘캠벨 수프'(1962) ⓒThe Andy Warhol Foundation
▲ 워홀은 코카콜라처럼 대중이 사랑하는 상품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The Andy Warhol Foundation
▲ 마릴린 먼로의 죽음 직후 제작된 ‘마릴린 제단화’. ⓒThe Andy Warhol Foundation
▲ 총격 사건 이후 1970년대부터 워홀은 죽음을 주제로 한 작품에 매달렸다. ⓒThe Andy Warhol Foundation
[죽은 예술가의 사회-60] 앤디 워홀(팝아트 아티스트, 1928~1987)◆ 미국의 아이콘 앤디 워홀미국에서는 감옥에도 투자할 수 있다. 미국 정부는 비용 절감을 위해 일부 교도소를 민간 기업에 운영을 맡긴다. 이 교도소 기업들은 증시에 상장돼 있다. 감옥도 주식으로 만들어버리는 치밀한 자본주의는 미국의 강력한 무기다. 미국은 더 많은 부를 쌓기 위해 악착같이 싸우는 사람들의 욕망을 위대하게 여겼다. 그렇게 미국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됐다. 미국 경제 시스템을 수혈한 나라들 역시 고속 성장했다. 하지만 어디에든 그림자는 드리운다. 자본주의에는 감옥이라는 어둠도 돈으로 환산하는 비정한 얼굴이 있다. 이런 자본주의의 기운을 포착해 예술 장르로 만든 인물이 앤디 워홀이다. 그는 이 시대의 풍요와 비정함을 동시에 바라봤다.◆ 잭슨 폴록이 떠나고 앤디 워홀이 등장했다1940년대 초반, 미국은 강대국 반열에 올랐다.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미국을 무시할 나라는 없었다. 하지만 미국에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유럽에서는 인상파, 다다이즘, 입체파,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야수파 등 다양한 예술 사조가 명멸했다. 그 시간에 미국은 도로를 내고, 빌딩을 짓고, 공장을 짓고, 자동차를 대량 생산했다. 황무지 개척에 힘 쏟느라 예술이라는 상징 자본을 쌓을 시간이 없었다.현대예술 수도가 파리에서 뉴욕으로 기울기 시작한 건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부터다. 유럽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 자본가들은 유럽에서 온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뉴욕 곳곳에서 유럽 예술가들의 전시회가 열렸다. 뉴욕은 현대예술의 주요 무대로 부상했지만, 미국의 열등감은 치유되지 않았다. 미국에는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위대한 예술가가 필요했다. 그렇게 잭슨 폴록이라는 이단아가 탄생했다. 피카소 이후 더 이상 회화의 혁명은 없으리라 믿었던 미술계는 폴록의 액션페인팅을 보며 기겁했다. 미국의 평론가, 언론, 자본은 힘을 합쳐 폴록을 스타로 만들었다. 폴록은 전 세계가 가장 주목하는 화가가 됐다. 미국 미술 위상은 수직상승했다. 하지만 폴록의 시대는 길지 않았다. 그는 1956년 44세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미국은 새로운 미국인 예술가를 발굴해야 했다. 워홀은 바로 이 공백기에 튀어나왔다.◆ 캠벨 수프 통조림워홀은 미국으로 건너온 체코슬로바키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유년을 보내고 그곳에서 대학까지 나왔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워홀은 대학 졸업 후 곧장 뉴욕에 입성했다. 1950년대 초였다. 뉴욕 미술계 전체가 잭슨 폴록 찬양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워홀은 광고회사 일러스트레이터로 경력을 쌓았다. 뉴욕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뉴욕 아트 디렉터스 클럽’ 어워드에서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오는 이 대회는 디자인계의 ‘아카데미상’이라고 불릴 만큼 권위가 있다.10년간 광고회사를 다닌 워홀은 성공한 상업 디자이너 지위를 누렸지만, 만족하지 않았다. 잘나가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진지한 예술가가 되고 싶어 했다. 폴록처럼 슈퍼스타가 되기를 꿈꿨다. 그는 피카소도 폴록도 시도하지 않은 무언가를 창조하고 싶어 했다. 뉴욕의 한 갤러리 주인이 워홀에게 말했다. “이제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에서 이야기를 찾아야 해. 수프 캔을 그려보는 건 어때?” 기민한 직관력을 가진 워홀은 이 제안에서 성공의 냄새를 맡았다. 워홀은 마트에서 쉽게 볼 수 있고, 자신도 자주 먹는 캠벨 수프 통조림을 떠올렸다. 1962년 워홀은 32개의 캠벨 수프 통조림을 그려 전시했다. 그렇게 팝아트 시대가 개막했다.◆ “대통령도 나와 똑같은 코카콜라를 마신다”워홀은 자본주의를 이렇게 정의했다. “내가 미국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은 것을 소비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TV를 보고 코카콜라를 마시는데, 대통령이나 우리나 똑같은 코카콜라를 마신다. 돈을 더 준다고 더 나은 코카콜라를 마실 수 없다.”1960년대 미국은 워홀이 예찬한 자본주의가 실현되던 시대였다. 컬러 텔레비전이 대대적으로 보급됐다. 미국인들은 텔레비전으로 드라마를 보고 비틀스 음악을 즐겼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극장에 가서 같은 돈을 지불하고 같은 영화를 보며 같은 배우에게 열광했다. 모든 사람이 햄버거를 먹으며 코카콜라를 곁들였다. 워홀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대중문화야말로 민주주의라고 생각했다. 워홀은 코카콜라처럼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제품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물론 워홀의 작품을 인정하지 않는 비평가도 많았다. 그들은 워홀에겐 진지함이나 예술가의 고뇌가 없다며 무시했다. 하지만 대중은 워홀의 실험에 호응했다. 알쏭달쏭한 추상화와 비교하면 워홀의 작품은 이해하기 쉬웠다. 워홀을 따라서 대중적인 코드를 이용해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들이 등장했다. 팝아트 전성기가 열렸다.워홀은 자본주의를 소재로 작품을 만드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자본주의의 주인공이 되기로 한다. 1964년 뉴욕 맨해튼에 스튜디오를 연다. 워홀은 스튜디오를 ‘팩토리'(공장)라고 불렀다. 이 공장에서 워홀은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팝아트 작품을 대량으로 제조했다. 예술 작품을 대량생산한다는 개념 자체가 하나의 예술 실험으로 받아들여졌다. 워홀의 명성은 코카콜라나 캠벨 수프처럼 빠르게 퍼졌다.팩토리에는 온갖 뉴요커들이 드나들었다. 가수, 배우, 시인, 화가, 모델이 팩토리에 모였다. 매일 밤 파티가 열렸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팩토리 안에서 함께 춤을 추고, 영감을 나눴다. 그들은 마약에 취해 흥청망청 젊음을 소비했다. 워홀은 팩토리에 온 다양한 군상을 관찰하며 그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는 팩토리를 찾은 인물들로 실험적인 단편 영화를 제작했고,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록밴드에 공연 무대를 제공했다. 워홀의 팩토리는 예술 공장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젊은 예술가들은 기꺼이 워홀의 재료가 되기 위해 팩토리를 찾았다.◆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워홀은 죽음이라는 주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1962년 마릴린 먼로가 세상을 떠난 직후 워홀은 먼로 얼굴로 연작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표작은 ‘마릴린 제단화'(1962)다. 워홀은 전성기 시절 먼로 얼굴 50개를 나열했다. 왼쪽 25개 캔버스에서 먼로 얼굴은 생기 넘치는 금빛으로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오른쪽 25개 캔버스 속 먼로는 흑백이다. 오른쪽으로 향할수록 얼굴은 서서히 희미해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다. 먼로의 죽음을 상기시키는 작품이다.워홀은 대중문화 이미지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살았고, 그것을 긍정하며 예술 주제로 삼았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공허함도 봤다. 먼로의 실제 삶은 불행과 고독으로 가득했다. 운 좋게 스타가 되긴 했지만, 행복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하지만 세상의 관심사는 먼로의 섹스 심벌 이미지뿐이었다. 먼로는 죽었지만, 그의 이미지는 죽지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먼로는 섹시한 여배우 대명사로 소비된다. 워홀이 스타의 죽음을 주제로 삼은 건 이미지가 전부가 돼버린 시대의 비정함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죽음에 집착한 워홀은 실제로 죽음 문턱까지 다녀왔다. 1968년이었다. 워홀 팩토리에 드나들던 인물 중 밸러리 솔라나스라는 여성이 있었다. ‘남성을 말살해야 한다’는 과격한 사상에 사로잡힌 인물이었다. 솔라나스는 작가였는데, 워홀이 자신의 작품을 하찮게 여기자 앙심을 품었다. 솔라나스는 워홀에게 세 발의 총알을 쐈다. 긴 수술 끝에 겨우 목숨을 건진 워홀은 평생 후유증을 안고 살아야 했다. 이 총격 사건 이후 워홀은 변했다. 날것의 에너지를 내뿜는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그들로부터 뭔가를 얻어냈던 워홀은 낯선 사람을 경계하며, 신경질적인 인간으로 변했다.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던 팩토리 운영 방식은 변화했다. 파티는 끝났다. 팩토리는 아무나 입장할 수 없는 폐쇄적인 공간이 됐다.총격 사건 이후 워홀은 본격적으로 죽음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들었다. 아예 해골 이미지로 연작을 그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부자들과 유명인 초상화를 그리며 막대한 대가를 받기도 했다. 뉴요커답게 그는 계속 돈을 벌어 풍요로운 삶을 유지했다. 동시에 그 풍요를 한 번에 앗아갈 죽음의 공포 앞에서 떨었다. 워홀은 죽음이 이른 시기에 자신에게 찾아올까 두려워 병적으로 건강관리에 집착했다. 하지만 그는 허무하게 떠났다. 1987년 담낭수술 중 의료사고로 59세에 죽음을 맞이했다.◆ “돈 버는 것이 최고의 예술””나를 알고 싶다면 작품의 표면만 봐주세요.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워홀은 자신의 겉모습만 봐달라고 했다. 그것이 전부라고 했다. 자본주의, 소비문화 시대의 승리자. 이것이 워홀의 표면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죽음의 이미지들은 표면 뒤의 다른 워홀을 상상하게 한다. 눈부신 성공을 누리는 와중에도 ‘결국 이 뒤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차린 사람의 공허가 느껴진다.보통 사람의 삶은 워홀 작품처럼 비슷한 이미지의 나열로 가득하다. 우리는 매일 같은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일터로 간다. 어제와 비슷한 일을 하고, 유사한 고민을 하고, 먹던 음식을 또 먹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안부를 물으면 “늘 똑같지”라고 대답한다. 일상은 귀찮고 성가시고 지루한 과제로 가득한데, 이 모든 것이 계속 반복된다. 어제와 비슷한 오늘을 살다 보면 고통에도 둔감해진다. 무서운 공포 영화도 수차례 반복해서 보면 끔찍하지 않은 법이다. 그래서 가끔씩 멈춰 서서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이 시대가 만들어낸 그저 그런 이미지 중 하나일 뿐인가’ ‘나는 돈 버는 기계인가’ 이런 자기연민이 꼭 나쁜 건 아니다. 이 삶에 관해 거리를 두고 생각할 시간도 필요하다. 일상에 무뎌져 직진만 하다보면 어딘가가 곪는 법이다.세속적인 성공에 광적으로 집착한 워홀도 이따금 죽음을 생각하며 멈췄다. 기계처럼 끊임없이 성공 신화를 찍어내던 워홀은 이 모든 것이 한 번에 사라질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도 또다시 기계처럼 돈을 벌었다. 워홀은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우리의 내일은 오늘과 비슷할 테고, 모레는 또 내일의 복사 버전일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언젠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할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허무에 유혹당하지 않고 오늘도 돈을 벌기 위해 묵묵히 몸을 움직인다. 워홀은 이렇게 말했다. “돈 버는 것이 최고의 예술이다.”[조성준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앤디워홀 – 아트앤에디션
앤디 워홀은 팝아트를 대표하는 멀티 아티스트이다. 도발적인 주제와 혁신적인 제작기법, 파격적인 언행으로 화제의 중심에 섰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디자이너, 사진가이자 영화 제작자였다. 그는 슬로바키아 출신 이민자가정에서 태어나 카네기멜론 대학교에서 산업 디자인을 전공한 후 뉴욕으로 이주해 화가, 아방가르드 영화, 레코드 프로듀서, 작가 등 전방위 활동으로 세계적 명성을 쌓으며 동시대 최고의 유명인이 됐다. 1952년 드로잉 15작품으로 개인전을 연 것을 시작으로 1956년 뉴욕 MoMA에서의 그룹전 등을 통해 재스퍼 존스, 로버트 라우센버그, 키스 해링, 장 미쉘 바스키아 등 작가들과 활발히 교류했고, 정치인이나 헐리우드 스타, 거대 도시 문명 속 기물들을 소재로 대중화된 문화의 가치와 의미를 직관하도록 예술품의 대량생산에 앞섰다. 강렬한 색상과 명도의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제작한 〈100개의 캠벨 수프 캔〉, 〈1달러 지폐 200장〉, 〈금빛 마릴린 먼로〉 등 극명한 현대의 이미지를 포착한 작품들은 이후 다른 작가들의 오마주로도 유명하다. ‘공장(The Factory)’이라는 작업실에서 사람들을 고용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고 <팝피즘:앤디 워홀의 60년대>와 <앤디 워홀의 철학>을 쓰며 작가로도 활동해 1970년 비틀즈와 함께 라이프 지가 선정한 1960년대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에 뽑히기도 했다. 그는 예술사조와 상관없이 풍요로운 현대 사회를 대변하는 명쾌한 예술가의 성공사례가 되었다. 인권운동에도 앞장선 팝아트의 상징이자 우상이다. 미국 피츠버그에 개인 미술관으로는 최대의 앤디 워홀 미술관이 설립되었다.
모든 팝아티스트의 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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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팝아티스트의 우상
앤디 워홀은 팝아트를 대표하는 멀티 아티스트이다. 도발적인 주제와 혁신적인 제작기법, 파격적인 언행으로 화제의 중심에 섰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디자이너, 사진가이자 영화 제작자였다. 그는 슬로바키아 출신 이민자가정에서 태어나 카네기멜론 대학교에서 산업 디자인을 전공한 후 뉴욕으로 이주해 화가, 아방가르드 영화, 레코드 프로듀서, 작가 등 전방위 활동으로 세계적 명성을 쌓으며 동시대 최고의 유명인이 됐다. 1952년 드로잉 15작품으로 개인전을 연 것을 시작으로 1956년 뉴욕 MoMA에서의 그룹전 등을 통해 재스퍼 존스, 로버트 라우센버그, 키스 해링, 장 미쉘 바스키아 등 작가들과 활발히 교류했고, 정치인이나 헐리우드 스타, 거대 도시 문명 속 기물들을 소재로 대중화된 문화의 가치와 의미를 직관하도록 예술품의 대량생산에 앞섰다. 강렬한 색상과 명도의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제작한 〈100개의 캠벨 수프 캔〉, 〈1달러 지폐 200장〉, 〈금빛 마릴린 먼로〉 등 극명한 현대의 이미지를 포착한 작품들은 이후 다른 작가들의 오마주로도 유명하다. ‘공장(The Factory)’이라는 작업실에서 사람들을 고용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고 <팝피즘:앤디 워홀의 60년대>와 <앤디 워홀의 철학>을 쓰며 작가로도 활동해 1970년 비틀즈와 함께 라이프 지가 선정한 1960년대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에 뽑히기도 했다. 그는 예술사조와 상관없이 풍요로운 현대 사회를 대변하는 명쾌한 예술가의 성공사례가 되었다. 인권운동에도 앞장선 팝아트의 상징이자 우상이다. 미국 피츠버그에 개인 미술관으로는 최대의 앤디 워홀 미술관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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